본문 바로가기

플로리다 PhD life

연구에 집중이 잘 안되는 내가 애틋하다

모쪼록 전세계 아무나 볼 수 있는 전체글로 무언가를 남길 때는, 

 

"매일 신나고 즐겁고 화창해요. 저는 정말 행복하답니다!"

라고 적고 싶지만, 요즘은 이유없이 우울하고 기운이 없는 시기가 이어지고 있다.

카톡개의 표정처럼 내가 처한 상황이 복에 겨운 일들이 많기 때문에 이런 얘길 하는 것 자체가 겸연쩍기까지 하다. 누군가가 불행하지 않다면 행복한 인생이다라고 말했었는데, 지금의 나는 "불행"한 상태는 아니기에 행복한 인생인가? 분명 내가 생각했을 때 요즘의 내 일상은 불행할 일이 없고,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들이 정말 많은데 도대체 왜! 나는 이렇게 우울하고 기운이 없는 것인지?

 

매우 좋은 회사에서 인턴을 하면서도 (심지어 사수분마저 인생 멘토급의 천사), 곧 일 년만에 얼굴을 보게되는 남자친구가 미국으로 올 예정이면서도, 데이터 과학 분야에서의 탑 컨퍼런스에 낸 논문이 구두 발표를 하게 된 좋은 소식이 있으면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함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이것이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호르몬의 장난이라면 차라리 마음이 편하겠는데, 연구에 집중이 안되는 기간이 꽤나 몇 달 째 길어지고 있다.

 

해야 할 일을 명쾌하게 해치운다기 보다 매일 매일 조그마한 방패로 화살속을 막아보려 하는 그런 마음이랄까.

연구자들이 느끼는 Imposter Syndrome, 즉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과대 평가 받고 있다는 느낌, 그래서 결국 진짜를 알아보는 사람들에게서 당당할 수 없다는 그런 생각 때문인가. 아니면 나와 늘 함께 해주는 누군가가 "물리적"으로 부재했던 기간이 1년여가 되면서 마음이 공허함과 외로움에 취약해져서 인가. 무엇이 나를 지금 내가 하는 일에 집중하게 하지 못하고 있는지 참 의문이다.

 

이러한 무력감 구름이 내 머리위에 위젯처럼 둥둥 떠나니고 있다는 사실은 썩 유쾌하지 않다.

하지만 그 유쾌하지 않음이 나의 소중한 오늘을 집어삼키는건 더욱 더 유쾌하지 않다.

이렇게 블로그에 글을 남기는 이유도 조금이라도 그 무력구름의 신호를 낮추고 나 자신을 조금 더 단단하게 본질적인 삶의 궤적에 올려두고 싶기 때문이다.

 

예전에 서강대에서 라틴어수업을 들었을 때 한동일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해주신 말이 있다.

"왜 최상의 컨디션으로 공부해야만 합니까?"

이 말을 들은지 거의 십 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이유는 나에게 힘이 없는 상황에서도 공부를 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는 최상의 컨디션(a.k.a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상태에서만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이 말을 듣고 나서는 기분이 안 좋든, 몸이 아프든, 내가 해야하는 일이 있으면 꾸역꾸역 지친 심신으로 어찌어찌 일거리들을 해결해가는 것도 가능하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 (변화 전) 최상의 컨디션이 아니다 -> 최상의 컨디션이 돌아 올 때까지 기다리고 회복되면 한다.
  • (변화 후) 최상의 컨디션이 아니다 -> 최상의 컨디션이 아닌 상태로도 할 수 있으니 뭐라도 해봄 (여전히 안내키고 아웃풋이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음 - 제출은 가능한 상태

변화 전의 경우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기에, 굉장히 많은 통제와 규칙들이 필요했다. 실제로 수능과 같은 목표가 명확한 입시 교육만을 목적으로 했을 때는 변화 전의 방법이 매우 잘 먹혔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내 컨디션만 최상이면 되는게 아니라 다른 주변 사람들 및 시대적 상황 등 다양한 컨디션이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조건들을 안고 가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제출은 가능한 상태" 라는 표현이 나의 요즘 일처리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요약하는 것 같다. 그래 제출은 하잖니 그래도. 

 

내가 언제나 기쁘고 들뜬 열정 가득한 새내기의 마음으로 연구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또한 내 신체와 마음이 언제나 베스트 컨디션을 유지하며 의자에 오래 앉아서 총기 가득한 눈빛으로 논문을 쭉쭉 써내려 갈 수 없음도 안다. 박사 생활을 한 지 만으로 3년이 꽉 채워져 가는 지금. 나는 최상의 컨디션이 아니다. 이유없이 우울하고 무력한 시기를 겪고 있다. 이런 상태로도 뭐라도 해보고 있는 지금의 나에겐 성과 위주의 평가를 멈추고자 한다. 대신 오늘 하루 또 한 번의 일상을 잘 넘겨 간 스스로를 칭찬하고 다독여 주련다. 이 일기의 마무리는 내가 좋아하는 또 오해영의 명대사로.

 

난 내가 여전히 애틋하고 잘  되길 바라요. 여전히.

 

 

그래서 내일 일정은 새벽 6시 코딩 부트캠프부터 시작한다구?

나새끼 애틋해 증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