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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다 PhD life

정말 가고 싶은 회사를 떨어졌을 때

12/10일 페이스북 파이널 라운드 인터뷰가 끝나고, 12/17일에 탈락 결과를 받았었다.

예상을 벗어난 문제가 아니었기에 꼭 될 줄 알았고, 인터뷰 복기를 할 때마다 분위기 좋게 진행되었다고 생각했었기에 탈락 소식을 듣고 정신적으로 타격이 심하게 왔었다.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이 곳 말고는 내년 여름에 갈 곳이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유일하게 있던 목표가 없어졌다는 느낌과, 이 포지션 말고는 모든 것이 의미 없는 피상적인 행위라는 느낌, 그래서 내가 본업으로 하고 있는 박사 과정의 리서치마저 무의미하게 다가오는 점이 견디기 힘들었다.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알기에, 이런 글루미한 슬럼프를 이겨보려고 하기보다, 그냥 져보기로 했다. 
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겠다. 

나는 나에게 방황할 시간을 주었다. 무언가를 억지로 꾸역꾸역 하기보다, 마침 겨울 방학이기도 한 만큼 무언가를 하고 싶지 않을 자유를 누렸다. 데드라인이 임박한 최소한의 리서치와 과제를 해결하고, 남는 시간에는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차차를 쓰다듬거나, 청소를 하거나, 사람들을 초대해 시간을 보내거나, 그것도 아니면 침대를 정돈한 후 푹신한 매트리스위에 몸을 눕히고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을 선택했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향해 달려나가는 - 때로는 스스로에게 가혹할 만큼의 열정을 강요하는 - 성미이기에 이런 의도적인 게으름이 마냥 속 편하지 만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의도적인 게으름은 내가 그동안 놓쳤던 작고 소소한 행복들을 발견하게 해주었다. 가입한 지 몇 달이 지나도록 엄두도 내지 못했던 넷플릭스 쇼들을 보기 시작했고, 게인즈빌에 남아있는 친구들을 초대해 즐거운 크리스마스 홈파티의 추억을 쌓기도 하였고, 차차와 원없이 달리기 하며 삼성태그와 에어태그의 차이점을 공부하기도 하고, 아이폰 13 프로를 구석구석 살펴보기도 하였다. 게인즈빌에 와서 처음으로 네일아트를 받아보기도 하고, 스리랑카 친구의 집에서 친구가 정성껏 준비해준 크리스마스 음식을 먹으며 크리스마스 영화도 보고, LA 학회에서 룸메였던 텍사스 교수님께서 사주신 타이 음식을 먹으며 수다도 떨었다. 몇 달 동안 방문하지 못했던 아처로드 스타벅스에 가서 매우 멋진 사이렌 물병을 교환하기도 했으며, 인터뷰 준비 때는 많이 하지 못했던 남자친구와의 카톡과 영상통화도 하고싶은 만큼 마음껏 했다.

 

어디로 가야 할 지 도무지 방향을 모르겠는 터널 속에서 더듬거리며 한 발자국 씩 용기내어 걸어가고 있다.

 

내가 원하는 목표가 사라진 것 같을 때, 힘껏 달리던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스텝이 엉켜 땅바닥에 넘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넘어진 김에 누워서 온 몸의 피로를 쭉 풀어본다. 누워서 하늘도 한번 보고, 다리 스트레칭도 하고, 왜 넘어졌는지 과거를 탓하기보다 넘어 졌을 때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본다. 나는 넘어진 김에 푹 쉬었다. 기존의 이정표가 사라졌기 때문에 360도 어떤 방향으로도 새로 시작할 수 있다. 내 자신의 가능성을 제한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어떤 방향이더라도, 나는 최선을 다해 걸어나갈 것이고 그 과정을 즐길 것이다.